dpfm 2018. 1. 31. 23:11
마족들이 휩쓸고 지나간 벨더는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파괴 당한 고향을 복구하고 정리하고 새로 만들어간다. 우리도 뭐 도울 것이 없을까-? 엘소드가 내뱉은 한마디에 일행들에게 각자 일이 떨어진다. 부탁하지! 노엘의 한마디에 등이 떠밀리듯이 일행들은 일을 돕기 위해 흩어졌다.



"그럼, 레이븐씨 당신은 서쪽 외곽 성문 수리하는 곳을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지."



서쪽 성문이라. 옛날에는 자주 그 성문을 통해서 야외 훈련을 나갔다. 세리스는 서쪽 성문을 통해서 나가는 길에 보이는 들판을 좋아했다. 여름이면 노란꽃이 만발하는 들판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녀는 마치 그 들판의 여신 같아 보였다. 추억의 단편을 떠올리며 서쪽 성문으로 향한다. 이 길을 쭈욱 따라서 보이는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빵집이 나올 때까지-였지. 하지만 걸어도 빵집은 보이지 않는다. 없어진걸까. 언제? 마족들이 없애버린걸까, 그전에 없어진걸까.



결국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저 멀리 보이는 무너진 성벽을 길잡이 찾아 서쪽 성문을 찾았다.부탁받은 자재들을 건내주고 잠시 수리를 돕기 위해 무너진 성문 위로 올라가본다. 저 멀리 평원이 보인다. 그 평원이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평원은 그대로다. 아직 꽃피는 계절이 아닌지 들판은 황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떠오른다.



이제 그녀는 없지. 다시 그것을 실감하고 작업을 돕는다. 작업이 이어지던 중 몇몇 사람이 웅성웅성 모여든다. 떠드는 소리 사이로 낯익은 호칭이 귀에 들어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부족한 자재들은 없나?"

"네, 아직은 괜찮습니다."

"이렇게 나와도 괜찮으신겁니까?"

"그대들이 일해주는데 귀족인 내가 틀어막혀 있을수는 없지."

"펠포드님께서 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펠포드 라고 불린 청년이 손을 저으며 웃는다. 청년의 땋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 웃음은 여전하다 싶어졌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붉게 변하고 손에 들려있던 나무 판자가 부숴진다. 청년과 잠시 눈이 마주친다. 꾸벅, 인사하고 청년은 인부들과 시야에서 사라진다. 살아, 남았군. 찹찹한 심정이 되어 부숴진 판자를 내려다본다.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속에 올라오는 쓴맛을 잊기 위해서 작업으로 신경을 돌린다.



해가 저물어가자 인부들이 일어나고 레이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동료들은 이미 와 있을까. 뻐긋한 몸을 이끌고 다시 거리를 걷는다. 여기서 반향만 돌리면 자신이 살던 저택이 있던 곳도 나올거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레이븐님."



그곳에 가볼까, 망설이던 발걸음을 돌린 것은 바네사의 부름이었다.



"혹시 바쁘신가요?"

"아니, 괜찮다. 무슨 도울 일이라도 있나?"

"그게 아니고 전에 벨더에서 사셨다고 하셨죠?"



그랬나? 자신이 아니라 제 동료들이 한 말인지도 모른다. 바네사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두껍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 표지에는 금박 글씨로 역사 기록서 라고 적혀 있다. 받아들이자 책이 펼쳐지고 책갈피가 떨어지면서 페이지가 펼쳐진다. 표시 되어 있는 덕에 글자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레이븐 크론웰이라고 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나를, 알아본것인가?"

"나름 역사 공부를 했거든요."



표시된 문단을 천천히 읽어간다. 왕국력 944년 크로웰 장군의 아들, 반역, 탈옥, 전투, 사망. 짧고 간단하게 쓰인 과거의 이야기. 아래로 좀 더 내려간다. 반역자를 잡은 공로로 펠포드 가문의 위상은 높아졌다. 다시 쓴맛이 올라온다. 아까 본 청년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자랑스러워할까.


페이지 맨 아래 주석을 본다. 크론웰 가문의 몰락. 964년, 반역죄가 누군가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현재 크론웰 가문의 반역죄는 사라진 상태이나 누가 그런 음모를 꾸몄는지 알 수가 없다.


 "누가 그랬는지 아시나요?"


땋은 머리카락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이미 과거일뿐이지."


자신도, 그녀도, 증오의 대상인 그녀석도 전부 역사서 한 페이지를 차지한 한날 이야기가 되었을뿐이다. 책을 다시 바네사에게 돌려준다. 크론웰 가문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시선을 한 번 던지고 레이븐은 일행들이, 지금 현재의 자신의 자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